문헌록 전자족보(대동보) > 문헌록
           
1. 문헌 목록 〉10. 10世 〉6. <요재공>통훈대부행곡성현감도암공휘찬묘지(通訓大夫行谷城縣監陶庵公諱纘墓誌)
1. 문헌 목록 〉10. 10世 〉8. <요재공>삼현사우중수기(三賢祠宇重修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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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요재공>태인공사실유지기(泰仁公祠室遺址記)
泰仁公祠室遺址記 凡家必有廟廟必有主歷四世而遷桃乃士大夫通行之禮雖以吾家故泰仁縣監公之賢宜在此限祀止前廟毀何保守遺址至三百年之久而又欲文以記之也噫目夫周末游學盛而士輕離其鄉及泰人開阡陌廢禮義析宮出贅而宗法大壞民於是乎有忘其本始者居今而思復古道姑不以世居爲善也歟若玉川氏之居昇平龜湖村者十世同井或服勤而治疇或纘業而劬經相與講禮修睦彬彬有古昔晟時死徒不出鄉之餘俗是以爲宗裔者雖或不恆厥居而先世樓神之地依舊自在使鄉閭皦然知公之廟址于以見君子之澤愈久不斬雲仍之心亦不忘本吁其懿哉公即我叔祖井邑公之肖孫諱大承以蔭調出而少試民社之間而有遺愛如其仁矣先見乙巳禍機超然色擧如冥鴻之遠矰繳如其智矣在朝則白休菴金甑山皆爲之先容處鄉七許上庠淹鄭司直思翊又爲之至契交游如其勝矣第念其仁如此其智如此其交遊之勝如此後人之高山景行儻何如耶且以公後承之心推之祀止四代禮也感至百世情也追遠之中亦不能無賢其賢而親其親之思繼玆以往高山景行同於後人賢賢親親同於後承則當時祠室之址守之欲其久記之欲其詳宜爾族侄炳寬爲余説其事記之如玆一以作宗中舊蹟一以備洞中故實址在謙川西龜頭之上 傍裔 寅錫 謹記 태인공사실유지기(泰仁公祠室遺址記) 대체로 한 집안에는 반드시 사당이 있기 마련이고 사당에는 반드시 신주가 있게 된다. 四세를 지난 뒤 체천하는 것은 사대부가 통상적으로 쓰는 예이다. 비록 우리 집안이 태인(泰仁) 현감공의 훌륭한 점을 가지고 있지만 마땅히 이제 한을 따라야 하고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면 사당도 헐리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남은 터를 三백 년이란 오랜 세월을 보존해 왔고 또 문자로써 기록하고자 하는가. 아! 주(周)나라 말기로부터 유학(游學)이 성행하여 선비가 가볍게 그 고향을 떠나고 또한 진나라 상앙(商鞅)이 정전(井田)을 없애고 천맥(阡陌)을 열며 예의를 폐하고 사당을 헐어 사치를 하니 종법(宗法)이 크게 무너지고 백성이 이로부터 그 근본을 잃어버린 자가 있었다. 이제 와서 옛것을 회복할 도리를 생각하니, 짐짓 대대로 살며 착한 일을 하였다고 아니하겠는가. 우리 옥천 조 씨가 승평 귀호촌(龜湖村)에서 十세를 한 우물을 먹고 지내오며, 혹은 부지런히 하여 전답을 가꾸기도 하고 혹은 선업을 이어 글을 힘쓰는 등 서로 더불어 예의를 강론하며, 돈목을 닦으니 아름답게 옛적 성시에 죽어 옮겨 가도 고향을 떠나지 아니한다는 풍속이 남아 있다 하겠다. 이로써 증손 된 자 비록 항상 그곳에서 살지 아니해도 선세의 신도가 깃들인 땅은 그대로 남아 있어 향방(鄉坊)으로 하여금 공의 사당터를 명확히 알게 하니 이에 군자의 기친 덕택이 오래가면 갈수록 더욱 끊어지지 않고 자손의 마음이 또한 그 근본을 잊어버리지 아니함을 보겠으니, 아! 아름답도다. 공은 곧 나의 둘째 할아버지 정읍공의 어진 손자로 휘는 대승(大承)인데 음직(蔭職)으로 나가서 얼마간 지방의 수령이 되어 끼친 사랑이 있었으니, 이렇듯 그는 어질었으며 을사사화(乙巳士禍)의 기미를 먼저 보고 초연(超然)히 떠나기를 높은 하늘에 나는 기러기가 주살을 멀리한 것같이 하였으니, 이렇듯 그는 지혜로웠으며 조정에 있을 때는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 김증산(金甑山) 등이 먼저 허여해 왔고 시골에 처할 때는 삼사허엄(三舍許淹) 사직정사익(司直鄭思翊)과 또 지계(至契)가 되어 교유(交游)하였으니 이렇듯 그는 우수(優秀)함을 나타냈도다. 이에 생각하면 그 어짊이 이와 같고 그 지혜가 이와 같으며, 그 우수함이 이와 같으니 후인(後人)이 높은 산을 우러보듯 큰 도를 따르듯 함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또 공의 후손이 마음으로써 미루어 생각하면 제사를 四대에 그치는 것은 예이지만 감모(感慕)하는 마음이 백세에까지 가는 것은 정이니 멀리 추모한 가운데 또한 능히 그 어진 이를 어질게 하고 그 친한 이를 친하게 하는 생각이 없을 수 없으니, 이로부터 높이 우러러봄을 후인과 함께 하고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고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는 것을 후손과 함께 하려 한즉 당시 사당터를 지켜 오래도록 보존하고 기록하기를 자세하게 하려 함이 마땅하도다. 족질 병관(炳寬)이 나보고 그 일을 말하라고 하기에 이와 같이 기록하여 한편으로는 종중 구적을 삼으려 함이요 한편으로는 동중 고실(洞中故實)을 구비하기 위함이다. 터는 겸천 서쪽 귀두 위에 있다. 傍裔 寅錫 삼가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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